- 김은남 기자 | 호수 284 | 승인 2013.02.26 09:20
경제적으로 어려운 청년을 위한 공제조합이 생겼다.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든 협동조합이다. 15~39세 청년이 매달 5000원 이상 출자하면 급할 때 돈을 빌려준다.
“지금 쌀이 떨어져 굶고 있어요.”
조금득 청년유니온 사무국장(35)은 인터넷 게시판에 올라온 한 조합원의 글을 보고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최고은 작가의 비극적 죽음이 있은 지 얼마 안 된 시점이었다.
놀라운 것은 이 글을 본 다른 조합원들의 반응이었다. “우리 집에 쌀이 있다. 어디로 가져다주면 되나” “나도 라면이 있다” “우리 계좌를 열어 모금을 하자”. 피차 형편이 넉넉지 않은 청년들이 앞을 다투어 댓글을 달았다.
조금득씨는 그때 깨달았다고 한다. ‘청년들이 이기적이라는 건 편견에 불과하구나. 청년들도 서로 도우며 함께 살고 싶어 하는구나.’ 그리고 또 하나의 깨우침. ‘그렇다면 청년들이 서로 도울 수 있는 상호부조 시스템이 필요하겠구나.’ 지난해 청년유니온 사무국장직을 내려놓으면서 조씨는 그 꿈을 구체화했다. ‘청년연대은행’(cafe.daum.net/ybank1030)을 만드는 일에 나선 것이다.
청년연대은행은 일종의 공제협동조합이라 할 수 있다. 조합원들이 매달 출자금을 모으고, 그 돈으로 급전이 필요한 조합원에게 소액 대출을 해준다. 계나 상조회를 협동조합 방식으로 운영한다고 이해하면 쉽다. 실제로 직장이 없거나 있어도 변변찮은 청년들에게 제도권 은행은 그림의 떡이다. 당장 생활비나 병원비가 필요해도 마땅히 돈 빌릴 데가 없어 사금융이나 사채업체를 기웃거리게 된다.
청년연대은행은 이런 이들을 위한 ‘문턱 없는 은행’이 되고자 한다. 가입 자격은 하나. 만 15~39세 청년이면 된다. 매달 5000원 이상 출자금을 내면 조합원 자격이 주어진다. 그 이상 연령대라도 취지에 공감한다면 특별 출자금을 내고 ‘명예 조합원’이 될 수 있다.
이렇게 청년들의 공제조합을 만들겠다고 했을 때 조씨가 가장 많이 들은 말은 ‘그게 되겠어?’였다. 현재도 공제조합들은 있다. 대부분 직장이나 지역을 기반으로 한다. 반면 세대를 내세운 공제조합은 정태인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원장의 말마따나 ‘세계 협동조합사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그럼에도 조씨는 흔들리지 않았다. 청년유니온을 처음 만들 때도 다들 그랬다. ‘세대별 노동조합이라니 말이 돼?’ 그러나 청년유니온은 마침내 탄생했고 청소년 최저임금, 30분 배달제 등의 문제를 사회 의제로 부각시키는 데 성공했다.
조씨는 청년들의 상황이 그만큼 절박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역시도 별명이 ‘알바 천국’일 만큼 온갖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던 때 청년유니온을 만났다. “서른이 코앞인데 모아놓은 돈은 없고, 일자리는 언제 잘릴지 모를 판이고, 믿었던 가족마저 위로가 되어주지 못하면서 나 자신이 쓰레기처럼 여겨지던 시절, ‘이건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토닥여주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세상이 다시 열리는 듯했다”라고 조씨는 말한다. 청년연대은행 또한 자신 같은 처지에 있는 청년들에게 세상으로 향하는 통로이자 안식처가 되기를 기대한다는 것이다.
한 달간 아홉 차례나 진행된 조합원 모임
서두르지는 않았다. 조씨는 뜻을 같이하는 이들과 함께 지난 1년간 차근차근 청년연대은행을 준비해왔다. ‘협동조합은 마음을 모으는 과정이 가장 중요하다’는 조언이 지렛대가 됐다. 지난여름부터는 자발적으로 모인 추진위원 30명이 매주 만나 협동조합을 공부하고 다른 공제조합을 돌아보면서 자신들이 원하는 조합의 밑그림을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입소문이 퍼지면서 조합원 수도 서서히 늘었다. 지난 1월 말 기준 조합원은 150여 명에 달한다.
2월12일 저녁 8시, 서울 홍익대 근처에서 열린 조합원 소모임을 찾아가 보았다. 청년연대은행은 이런 조합원 소모임을 같은 주제로 2월 한 달간 아홉 차례 진행했다. 되도록 모든 조합원이 자신에 맞는 시간대를 골라 모임에 참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이날 소모임에 참석한 신규 조합원 이태영씨(29)는 “내가 시민단체에서 일하는데, 사실 회원이 주인이라는 시민단체에서조차 이런 식의 모임은 상상하기 힘들다. 보통은 어떻게 해야 가장 효율적으로 모임을 한 번에 끝낼까 고민한다”라고 말했다. 그런 만큼 더디더라도 민주적인 의사결정 구조를 지키며 조합원 간 관계를 다져가려는 청년연대은행의 시도가 신선하게 다가왔다는 것이다.
지난 1년간 이들이 함께 숙성시킨 구상에 따르면 청년연대은행의 사업은 크게 두 축으로 진행된다. 하나는 대출이다. 50만원 한도 내에서 돈을 빌릴 수 있는 ‘일반 대출’, 자신이 낸 출자금의 70% 범위 내에서 돈을 빌릴 수 있는 ‘범위 내 대출’ 등이 그것이다(위 그림 참조). 조합원 소모임에 참석한 강종은씨(31)는 “오늘 보증금 200만원을 내고 월세 집을 계약하고 왔는데, 이럴 때 하다못해 이사비 정도라도 대출받을 수 있다면 큰 도움이 될 것 같다”라고 말했다.
단, 출자금을 냈다고 대출 자격이 자동으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일종의 활동 점수라 할 ‘토닥이 점수’가 일정하게 쌓여야 한다. 활동이라고 거창한 것은 아니다. 조합원 모임에 참석하고, 게시판에 글을 올리는 것만으로도 점수가 쌓인다. 다른 조합원의 이사를 돕거나 외국어·악기 공부모임 등을 통해 자신의 재능을 나누거나 하면 점수가 더 쌓인다. 자산이 담보가 되는 시중은행과 달리 청년연대은행에서는 ‘관계’가 담보가 되는 셈이다.
다른 한 축은 저축이다. 당장 돈 몇 만원이 아쉬운 이들이 저축이라고? 의아해하는 이들에게 조금득씨는 “저축은 돈의 문제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청년들 가운데 자신의 재무 상태를 전혀 돌아보지 않는 이들이 있다. 이런 생활이 반복되면 더 이상 자신의 미래가 궁금하지 않게 된다. 미래가 기대돼야 저축도 할 것 아닌가.” 그래서 청년연대은행은 조합원들이 자신의 돈 씀씀이 등 재무 상태를 점검하고, 저축 습관을 기를 수 있게끔 재무 상담을 진행할 계획이다. 상담 또한 조합원이 맡는다. 이를 위해 조합은 지난해부터 사회적 기업 에듀머니(대표 제윤경)와 함께 ‘청년재무상담사 양성 과정’을 운영하고 있다. 지난달 1기 상담사 30명을 배출했다.
지금까지 이들이 모은 출자금은 500만원 남짓하다. 어찌 보면 한 줌도 안 되는 액수다. 그렇지만 힘겨운 청년들 스스로 5000원, 1만원씩 모아 적립한 돈이기에 값어치는 남다르다. “처음에는 조합원 출자금 외에 사회기관 등의 도움을 받아 기금을 따로 조성할까도 생각했다”라는 조금득씨는 서울 동자동 사랑방공제협동조합에서 만난 한 조합원의 말에 그 생각을 접었다고 했다(오른쪽 상자 기사 참조). “외부에서 돈이 들어오면 협동이 깨져.”
앞으로 공제조합을 넘어 생활협동조합으로까지 나아가고 싶다는 것이 청년연대은행의 포부다. 쌀이 떨어져 끼니를 거르고 아파도 병원에 가지 못하는 청년들의 문제가 돈에서만 말미암은 것은 아니라고 이들은 믿는다. 구멍 뚫린 사회안전망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관계의 단절이라는 것이다. “직업이 있건 없건, 여자건 남자건 이곳을 찾은 청년들이 공통적으로 호소하는 것은 외로움이었다”라고 조금득씨는 말했다. 고시원에서 산다는 한 여성 조합원은 ‘이러다 고독사할까 두렵다. 우리끼리 초등학교 때처럼 비상연락망을 조직하면 좋겠다’라고 제안하기도 했다. 곁에서 들여다보고 관심을 가져줄 누군가만 있어도 사람은 살 수 있다는 믿음이다.
청년연대은행은 2월23일 창립총회를 갖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추진위원으로 조합 설립에 참여한 한영섭씨는 “청년연대은행은 필연이라고 본다. 청년 세대의 절박함과 한국 특유의 강력한 온라인 기반이 만나 새로운 ‘협동조합 2.0’ 시대를 열어갈 수 있을 것이다”라고 자신했다.
원문보기 : 쌈짓돈 5000원으로 빈곤 떨치는 청년연대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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